생물 이름 연구/생물 이름 이야기

동백나무 - 춘희(椿姬)와 동백 아가씨

식물인간 2021. 3. 2. 13:19

동백나무

춘희(椿姬)와 동백 아가씨

 

 

글_이주희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클래식 음악에 눈을 뜨게 해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분이었다. 음악 시험 때마다 클래식 청음이 빠지지 않았다. 시험 기간이면, 음악 선생님이 학교 근처 음반가게에 특별히 부탁해서 주문제작한 테이프를 사서 카세트 플레이어에 넣고 지겹게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고역이었지만, 점차 익숙해지면서 클래식 음악에 귀가 열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클래식에 조금씩 호감을 느낄 무렵에, 선생님이 오페라 초대권을 나눠줬다. 성악을 전공했던 분이시라 아마도 학교 후배들의 공연 같았는데, 오페라는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어서 많은 기대를 안고 공연장을 찾았다. 오페라 제목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 그러나 그 공연은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 오페라 관람이 되고 말았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을 몇 시간씩 듣고 있다는 건 엄청난 고문이었고, 그 기억 때문에 지금도 오페라 관람은 부담스럽다.

 

동백꽃. 서양인들은 장미를 닮아서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

오페라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안겨준라 트라비아타는 프랑스 작가 알렉산드르 뒤마(Alexandre Dumas fils)의 소설동백꽃의 여인(La Dame aux camélias)이 원작이다. 아리따운 사교계 여인과 한 귀족 청년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것으로, 소설 제목은 항상 동백꽃을 꽂고 다녔던 여주인공의 별명이기도 하다. 오페라 제목인 트라비아타(traviata)’는 이탈리아어로 잘못된 길로 빠진 여인’, 타락한 여인을 뜻하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 소설 동백꽃의 여인을 흔히 춘희(椿姬)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본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본의 근대 지식인들이 이 작품을 번역하면서 제목을 쓰바키히메(つばきひめ)’라고 붙었다. 일본어로 쓰바키(つばき, 椿)’는 동백나무, ‘히메(ひめ, )’는 공주나 귀족의 딸 또는 아가씨를 뜻한다. 쓰바키히메는 우리말로 동백 아가씨라는 뜻이다. 이를 일본식 한자 표기로는 춘희(椿姬)’로 적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를 그대로 수입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한자어 중에는 근대 일본의 지식인들이 만든 낱말이 상당히 많다. 동아시아에서 서양의 근대 문명을 가장 먼저 수용한 게 일본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문 분야에서 쓰는 용어의 대부분이 일본식 한자어고, 일상에서 익숙하게 쓰는 말들도 굉장히 많다.

예를 들어 철학이라는 말은 일본인 최초의 서양철학인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필로소피(philosophy)’라는 말을 번역하면서 만든 말이다. ‘철학(哲學)’희구현철(希求賢哲)’의 준말로, 희구(希求)바라고 구하다’, 현철(賢哲)어질고 사리에 밝음을 뜻이다. 필로소피의 본래 뜻은 그리스어로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이라는 뜻이니, 필로소피와 철학은 뜻이 참 잘 통한다. 니시 아마네는 필로소피를 지혜()를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희철학(希哲學)’으로 번역했는데, 점차 이 말을 사용하면서 철학(哲學)’으로 줄여 쓰게 되었다. 이 외에도 주관, 객관, 현상, 개념, 이성, 오성, 연역, 귀납, 명제, 긍정, 부정 같은 철학에서 쓰는 대부분의 용어와 과학, 기술, 예술 등과 같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낱말을 바로 니시 아마네가 만들었다.

일본의 근대 지식인들이 서양 학문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만든 번역 한자어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과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널리 사용된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일본 지식인들이 전통적인 한학(漢學)에 기본적으로 능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양에서 수입된 개념과 낱말을 아무렇게나 번역하지 않고, 대개는 동양의 여러 고전을 살펴서 가장 뜻이 통하는 말을 만들었다. 그래서 한자에 익숙했던 당시 동양의 지식인들 사이에 거부감 없이 짧은 기간에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적인 문제로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거부감을 쉽게 드러낸다. 하지만 이미 살펴봤듯이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 없이는 우리의 언어생활이 이제는 불가능하다. 우리말이 있는데도 외래어를 쓰는 게 문제이지, 단지 일본에서 유래했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특히 외래어를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서 유독 영어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인데, 이는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만큼이나 우리의 의식 속에서 강대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한 탓은 아닐까? 그럼에도 라 트라비아타동백꽃의 여인춘희(椿姬)’로 부르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

(椿)은 본래 참죽나무를 뜻하는 글자다. ‘(椿)’동백나무라는 뜻으로 쓰는 것은 일본뿐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동백나무를 뜻하는 말은 산다(山茶, ‘산차라고도 읽는다.)’이다. 산에서 나는 차나무라는 뜻인데, 실제로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한다. 따라서 춘희(椿姬)’를 우리식 한자 쓰임새로 뜻을 새기면 참죽나무 아가씨가 되어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만 쓰는 한자어, 동백(冬柏)

동백나무는 아시아가 원산지로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분포한다. 따뜻한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중부 이남에서만 볼 수 있다. 동백나무는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꽃을 피우기 때문에, 한 겨울에 꽃을 볼 수 있어서 귀한 꽃으로 대접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이 전라도 감사에게 동백나무를 몇 그루를 화분에 담아 올려 보내라는 교지를 내린 기록이 있다. 동백나무가 자라지 않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동백나무를 키우는 것은 큰 사치였다.

동백나무는 겨울에도 푸르기에 겨울 동() 자에 상록수의 일종인 측백나무 백(, ) 자를 써서 동백(冬柏, 冬栢)이라고 표기한다. 동백나무를 가리키는 산다(山茶)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동백이라는 말을 훨씬 많이 쓴다. 그런데 동백은 우리나라에서 만들고 우리만 쓰는 한자어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동백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 때 기록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말인 것만은 확실하다. 또 조선시대 여자 이름 중에도 동백이란 이름이 많이 보인다.

한편, 동백나무를 뜻하는 일본어 쓰바키의 어원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에 우리말 동백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우선 가장 널리 알려진 설명은 두껍고 광택이 나는 동백나무의 잎과 관련한 것이다. 일본어로 광택을 뜻하는 쓰야(つや)’에 나무라는 뜻의 ()’가 합친 쓰야키(つやき)’에서 유래했거나 광택(つや)이 나는 ()’을 가진 나무()라는 뜻의 쓰야하키(つやはき)’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은 동백[tonbaik]과 쓰바키[tsubaki]의 음운상의 유사성을 근거로 한다. 고대시대부터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교류가 활발했고, ‘동백이란 말의 역사가 아주 오랜 만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동백나무는 17세기에 일본을 오가던 사람을 통해서 유럽에 처음 알려졌고, 원예용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부터다. 그러나 동백을 유럽에 처음 전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동백꽃을 본 유럽인들은 처음에 장미의 일종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동백나무를 카멜리아(Camellia)라고 하는데, 분류학의 아버지인 린네가 체코 출신의 식물학자인 카멜(Georg Josef Kamel, 1661~1706)을 기념해 붙인 이름이다. 카멜의 라틴어 이름이 카멜루스(Camellus)이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로 필리핀에 파견되어 식물 수집과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 <자연과생태> 2013년 2월호 (Vol. 67) pp. 7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