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로 지어진 이름
은행나무
글_이주희
중국 저장성(浙江省)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 은행나무는 겉씨식물로, 고생대에 출현해 아직 그 모습을 유지하는 살아있는 화석이다. 은행나무과에 속하는 식물들은 오래 전에 멸종하고 오직 은행나무 한 종만이 현존한다. 12세기 초부터 사찰에서 정원수로 심기 시작하다가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은행(銀杏)은 은행나무의 열매다. 모양이 은색이 나는 살구를 닮았다고 해서 은 은(銀) 자와 살구 행(杏) 자를 썼다. 은행나무는 또 공손수(公孫樹), 압각수(鴨脚樹)라고도 불린다. 전자는 할아버지 대에 심으면 손자 대에 가서야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은행나무를 심고 나서 열매를 맺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 때문에 붙은 이름이고, 후자는 은행나무 잎 모양이 오리 다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공자가 행단(杏壇)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데서 유래해 은행나무는 유학을 상징한다. 여기서 ‘행’이 정확히 은행나무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훌륭한 정원수로 여러 문인들에게 사랑받아왔고, 지금도 향교나 문묘와 같은 유학과 관련된 장소에는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구별되기 때문에 음양의 조화와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여 암수 한 그루씩 짝을 지어 심었다.
엎질러진 물, ‘ginkgo’라는 단어의 탄생 비화
서양에서는 은행나무를 ‘ginkgo’라고 쓰고 ‘징코’ 또는 ‘긴코’라고 발음한다. 그런데 막상 ‘-kgo’부분의 철자가 영 어색하다. 왜 이런 철자를 썼을까? 동아시아에서만 서식하던 은행나무를 처음으로 서양에 전한 사람은 독일인 의사 엥겔베르트 캠퍼(Engelbert Kaempfer, 1651~1716)다. 캠퍼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일본에 파견된 적이 있는데, 이때 처음 은행나무를 보았다. 이후에 그는 여러 나라에서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1712년에 『회국기관(廻國奇觀, Amoenitatum Exoticarum)』이라는 책을 낸다.
캠퍼는 이 책에 은행나무를 소개하면서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일본 책 『훈몽도휘(訓蒙図彙)』에 나오는 은행나무에 관한 내용을 참고한다. 그런데 일본의 한자 읽기가 워낙 복잡해서 캠퍼는 큰 혼란을 겪는다. 『훈몽도휘』에는 은행(銀杏)이라는 한자를 ‘긴쿄(きんきゃう)’, ‘긴낭(ぎんなん)’, ‘잇쵸(いちょう)’ 세 가지 발음으로 표기하고 있다. 참고로 ‘긴낭’은 은행 즉 은행나무 열매를, ‘잇쵸’는 은행나무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현재까지 사용하는 말이다. 아무튼 캠퍼는 『회국기관』의 원고를 쓰면서 대표 이름으로 ‘긴쿄’를 사용했으며, 그 발음을 ‘Ginkyo’ 또는 독일식으로 ‘Ginkjo’, ‘Ginkio’라고 쓰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출간된 책에는 ‘Ginkgo’라고 표시되었다.
누구의 실수일까? 오랫동안 사람들은 출판사가 실수로 ‘Ginkgo’에서 ‘k’와 ‘g’를 뒤바꾸었거나 ‘y’로 써야 할 자리에 ‘g’로 잘못 옮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일본 규슈대학의 볼프강 미첼-자이츠(Wolfgang Michel-Zaitsu) 교수는 캠퍼의 수기 노트와 원고의 필체를 비교하여 캠퍼의 『회국기관』 원고 원본에 잘못이 있음을 밝혀냈다.
캠퍼의 수기 원고들을 보면 여러 곳에서 철자법 실수를 저지른다. 그러나 은행나무(Ginkgo)를 잘못 표기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였다. 왜냐하면 훗날 분류학의 아버지인 린네가 캠퍼의 책을 참조하여 은행나무의 학명을 ‘Ginkgo biloba’ 라고 지었고, 이후로 ‘Ginkgo’라는 표기법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발음 따로 철자 따로다. 캠퍼는 네덜란드로 돌아올 때 은행나무 씨앗을 가지고 온다. 유럽으로 건너온 최초의 은행나무 씨앗인 셈이다. 그 씨앗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Utrecht)에 있는 식물원에 심었다고 한다.
참고
www.flc.kyushu-u.ac.jp/~michel/serv/ek/index.html
* <자연과생태> 2006년 9.10월호 (Vol. 5) p. 135
'생물 이름 연구 > 생물 이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천(明川)의 태(太) 씨가 잡은 물고기? 명태 (0) | 2020.06.26 |
---|---|
제주도에서 발견된 키 작은 콩나무 - 만년콩 (0) | 2020.05.11 |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 아카시아와 아까시나무 (0) | 2020.05.11 |
원래는 새끼돼지를 뜻하는 말, 돼지 (0) | 2020.05.07 |
연어, 송어(산천어), 열목어... 연어과 물고기 이름의 유래 (0) | 2020.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