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민물고기의 역사를 새로 쓰다
최기철(崔基哲, 1910~2002)
글_이주희 | 사진제공_우리교육
우리나라 민물고기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최기철 선생은 생물학자이기 전에 우리나라 과학교육의 터전을 닦은 교육자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1910년 10월 16일 대전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어렵게 살아야 했지만, 다행히 친척들의 도움으로 정규교육과정은 제대로 밟을 수 있었다. 1925년 대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철도학교에 동시에 합격한 그는 고민 끝에 교육자의 길을 걷기 위해 사범학교로 진학한다.
경성사범학교에서 보낸 6년간은 본격적으로 생물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다. 최기철 선생은 식민지라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인생의 진로를 놓고 깊은 고민에 파진다. 그러다 한 출판사가 개최하는 명사 초청 강연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남들이 하지 않는 자신만의 영역을 찾아서 인생을 바치면 큰 보람과 성공을 얻을 수 있다는 강연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자신감을 얻는다. 그러다가 생물학에 깊은 조예가 깊은 한 일본인 교사의 권유로 남산은사기념과학관에서 열린 조선박물학회 발표회에 참석했다가 생물연구에 미개척 분야가 많다는 사실에 큰 자극을 받고 생물학을 자신의 인생 목표로 정한다.
교육자로서 충실했던 젊은 날
1931년 경성사범학교 연습과(演習科)를 졸업한 최기철 선생은 전남 순천공립보통학교로 처음 발령받아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며, 1934년에 부인 이복순(李福順) 여사와 결혼한다. 이무렵 초등교육에 보람과 열정을 가졌던 그였지만 생물연구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고민 끝에 생물교사 자격을 갖춘 중등교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1935년 일본 문부성 시행 교원검정시험 동물과에 합격하여 생물교사 자격을 얻어 전주사범학교(1937)와 청주사범학교(1941)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떠난 교육현장에 교원이 턱없이 부족해져 그는 3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청주사범학교 교장(1945)과 충주사범학교 교장(1946)을 역임해야 했고, 급기야 서울대학교 교수로 초빙 받는다. 그는 극구 사양하다가 결국 1948년에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1975년까지 사범대학 생물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생물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동물생태학>(1959), <일반동물학>(1960), <일반생물학>(1969), <기초생태학>(1981) 등 생물학 관련 많은 책을 저술하거나 번역해 후학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79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를 지냈다.
50살이 넘어서 시작한 민물고기 연구
최기철 선생은 생물학자로서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그는 생물연구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생물학자라기보다는 교육자로서의 삶에 더 가까웠다.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힘든 피난생활을 할 때도 ‘전시 연합대학 생물과’라는 간판을 걸고 학생들을 모아 생물학을 가르칠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본격적으로 생물학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마흔을 훌쩍 넘어서부터며,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한반도 민물고기에 관한 연구는 보통 사람이라면 은퇴를 생각할 쉰 살을 넘어서 시작했다.
서울대학교에 재직 중이던 1957년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피바디대학교에서 동물생태학을 연구하고 이듬해에 우즈홀해양연구소에서 동물생태학과 패류의 인공적인 산란에 관해 연구하고 돌아와 이매패류의 생태 및 조기생산과 증산에 관한 연구를 했다. 그 결과 1966년에 “Tapes philippinarum의 幼生과 稚貝에 關한 生態的 硏究”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최기철 선생이 민물고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히 찾아온다. 패류를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썼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한반도 민물고기 분포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들어 있었다. 그는 1962년 강릉에 급한 볼 일이 있어 비행기를 탔다가 창문을 통해 발아래 펼쳐진 태백산맥을 바라보게 된다. 순간 그는 미국에서 본 로키산맥이 떠올랐고, 로키산맥을 중심으로 동․서로 생물상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는 태백산맥도 어쩌면 생물학적 격리의 요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특히 걸을 수도 날 수도 없는 민물고기가 지리적 격리에 가장 크게 영향 받는 생물일 것이라고 여겨 민물고기를 연구하기로 결심한다.
1968년 이후부터 최기철 선생은 본격적으로 한반도 민물고기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많은 논문을 남겼다. 그러나 전국의 하천이라는 하천은 다 돌아다니며 남한의 민물고기 분포도를 작성하는 방대한 작업을 시작한 것은 정년퇴임을 한 후부터다. 특히 1982년부터 약 10년간 집중적으로 전국 1천500개 면 4천900여 곳을 조사해 서식하는 민물고기 목록을 작성했다. 이렇게 해서 150종 및 특산종 41종을 확인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조사 자료를 토대로 민물고기의 전국적인 분포를 담은 분포도를 완성해 우리나라 민물고기 연구의 기초를 다졌다.
또 하천수질을 평가에서 버들치나 열목어, 산천어 등이 살면 마실 수 있는 1급수, 피라미나 갈겨니가 살면 2급수 등, 그곳에 사는 물고기 종류를 통해 급수를 정하는 방식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제안한 것도 그다. 우리나라에 사는 민물고기들의 서식환경과 생태에 대한 방대한 조사와 지식이 없었다면 그런 기준을 제안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자연보호와 후학들을 위해 헌신
최기철 선생은 한국동물학회장(1963), 육수학회장(1971), 한국담수생물학연구소장(1976) 등을 역임했고, 생물학에 미친 공로로 1972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교육 현장과 학계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자연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평생 노력했다. 1993년에는 ‘한국민물고기보존협회’를 만들어 우리 민물고기에 대한 일반인들과 어린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또 시민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면서 환경보호에 힘썼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그는 생물학자가 되길 희망하는 학생들의 모임인 ‘곤민(곤충과 민물고기)모임’을 후원하기도 했다. 2002년 10월 22일 노환으로 별세할 때까지 90여년의 생을 오직 자연과 아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살았던 최기철 선생은 언제나 우리에게 큰 스승이자 열정적인 과학자로 기억될 것이다.
참고문헌
1. 서울大學校 師範大學 生物科 同窓會, (1970), 『崔基哲博士 回甲紀念論文集』, 서울대학교
2. 이상권, (2007), 『첨벙첨벙, 물길 따라 물고기 따라-물고기 박사 최기철』, 우리교육
3. ‘민물고기의 용왕 최기철 박사’, 『중등우리교육』, 1994년 1월호(통권47호), 우리교육
4. ‘담수어표본 50만점 기증한 생물학의 큰 스승, 최기철 박사’,『과학동아』1990년 6월호(통권54호), 동아사이언스
5. ‘최기철’, 두산백과사전 http://www.encyber.com
* <자연과생태> 2008년 11,12월호 (Vol. 18) pp.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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