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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기(鄭文基, 1898~1995)

식물인간 2020. 4. 28. 20:20

수산학의 기틀을 다진 물고기 박사

정문기(鄭文基, 1898~1995)

 

글_이주희

 

유수(流水) 정문기(鄭文基)는 우리나라 어류연구과 수산학에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898919일 전남 순천의 한 한학자 집안에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7살부터 서당공부를 시작했으나 흥미를 못 느껴, 1년 쯤 다니다 신학문을 가르치는 강습소에 들어간다. 이후 순천보통학교와 은성학교를 거쳐 서울로 유학, 경신학교에 편입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 교장의 조선인 비하 발언 문제로 전교생 동맹휴학 사건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그를 포함한 4학년 전부를 중앙학교로 전학하는 조치가 취해진다. 중앙학교는 현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의 창설자이기도 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가 설립하고 교장으로 있던 학교다. 그곳에서 정문기는 앞으로 조선이 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 많은 인재가 필요하다는 김성수의 생각에 영향을 받아 도쿄제국대학 수산학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당시 대학에 입학하려면 일본 고등학교를 졸업해야만 했고, 고등학교를 입학하려면 일본 중학교 4학년 과정을 수료해야만 했다. 운 좋게 도쿄 메이지(明治)학원 4학년에 1명 결원이 생겨 편입시험을 치르고 합격한다. 하지만 그 학교는 졸업 후 와세다(早稻田)대학에만 진학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어서 이듬해인 192325살 늦깎이로 마쓰야마(松山)고등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축구와 야구 선수로 활동할 만큼 유독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운동 때문에 공부에 소홀해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고, 규슈(九州)제국대학 응용화학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도쿄제국대학 수산학부에 응시해 합격한다. 정원이 10명이던 수산학과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었던 그는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조선총독부 수산과 양식계 주임으로 부임한다.

 

수산시험장에서 시작한 우리 물고기 연구

정문기는 조선총독부 양식계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전국을 돌며 물고기의 생태를 조사·연구해 수산자원 양식방법과 번식법을 연구했다. 19398월에 한국인으로 처음 수산기사로 승진하고 9월에 평북 수산시험장장으로 취임한다. 1946년까지 경기·목포·부산 수산시험장장을 차례로 거쳤다. 이 기간 중에 인공부화를 통한 청천강 은어 복원사업을 성공했고, 압록강 어류를 조사하고 사루기(矢魚)와 쏘가리의 생활사를 연구했고, 국내 최초로 바지락 양식에 성공했다. 우리나라 김에 대해 연구를 비롯해 우리 물고기 이름에 관한 논문을 일본학술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정문기는 일본 유학시절 일본의 고문헌을 정리한 <고사류원(古事類苑)>라는 책을 보고 감흥을 받은 후 물고기에 관한 우리 고문헌을 수집·연구하는 일에 몰두한다. 특히 고문헌에 관심 있던 일본은행총재가 정약전(丁若銓, 1758~1816)<자산어보(玆山魚譜)>를 일본어로 번역출판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자산어보>의 여러 판본들을 수집정리해 원본에 가까운 새로운 판본을 만들고 일본어로 번역했지만, 일본 패망 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출간되지 못했다. 이후 우리말로 다시 번역하여 1977(지식산업사)에 출간했다. 이외에 <어자고(漁字考)>(1959)라는 논문을 통해 물고기 ()’자에 관한 문자학적 고찰을 시도했을 정도로 고문헌에 해박했다.

 

해방 후 학자로 행정가로 다양한 활동

해방 후 새로운 정부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 정문기는 수산분야에서 그동안 쌓은 경력을 인정받아 수산관련 주요 정책 수립 과정에 참여하고 행정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주요 요직을 맡는다. 1947부터 1948년까지 부산수산대학교 학장 겸 농림부 수산국장을 지냈고, 1951년부터 1960년까지 농림부산하 수산검사소장을 지내면서, 서울대, 성균관대, 경희대에서 강의했고 동국대 어류학과 교수(1957~1960)를 지냈다. 경희대 조영식 총장의 부탁으로 400여 종 2천여 점의 어류 표본을 경희대에 기증하기도 했다. 1962년에 부산수산대학교에서 명예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정문기는 1954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어 종신회원(1960)과 원로회원(1981)을 지냈고, 한국수산학회(1952), 한국수산기술협회(1965), 한국육수협회(1967) 초대회장을 지냈고, 금융통화위원(1962), 국토건설종합계획심의위원(1964), 문화재관리부위원장(1969), 문화재위원회(1977)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37년 조선축구협회 창립을 주도했던 그는 1960년 대한축구협회 초대회장을 맡기고 했다. 이와 같은 여러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학술원상(1955), 서울시문화상(1955), 홍조조성훈장(1960), 국민훈장모란장(1970), 과학기술상(1973), 3.1문화상(1978), 수당과학상(1978)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조선어명보(朝鮮魚名譜)>(1934), <한국어보(韓國魚譜)>(1954), <어류박물지(魚類博物誌)>(1974) 등 어류와 수산물과 관련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한국어도보(韓國魚圖譜)>(1977)는 우리나라 자생 어류와 관한 이전 외국학자들의 조사 내용과 그가 평생 조사한 내용을 합쳐 총 872종에 관한 분류학적 고찰과 발생분포생태 등을 정리한 역작이다. 그는 평소 운동을 좋아하고 근면한 성품이라 노년까지 비교적 건강 유지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가 199592797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표절 의혹과 남겨진 문제

정문기는 수산학자로서 또 행정가로서 우리 수산 분야의 개척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많은 전설적인 일화들을 남기고 물고기 박사로 불리며 찬사와 존경을 받았던 그의 이면에는 식민지시기에 성장한 지식인으로서 일본의 식민지배에 협력했다는 역사의 멍에를 쓰고 있다. 최근 이기복은 일제시기 조선산 어류연구와 우치다 케이타로라는 글(참고문헌 2에 수록)에서 정문기의 학문적 성과는 그의 도쿄제국대학 수산학과 선배이자 스승이고 수산시험장 시절 상관이기도 했던 일본학자 우치다 케이타로(內田惠太郞, 1896~1970)의 학문적 성과에 크게 빚지고 있다고 보며, 정문기의 일부 문헌에 대해서는 표절의혹까지 제기한다.

 

우치다는 192712월 수산시험장 기사로 우리나라에서 들어와 194212월 규슈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떠나기까지 15년간 전국을 돌며 우리 물고기에 대한 연구를 펼쳤다. 그는 특히 물고기의 수정 및 산란 생태에 관심이 많아 이 분야에서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이뤘다. 그러나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그가 채집한 대부분의 표본과 자료들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두고 떠났고, 일본의 갑작스런 패망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이기복은 해방 후 우치다가 남긴 자료에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이 정문기라고 말한다. 우치다의 자료가 없었다면 해방 직후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저술 및 학문 활동을 해나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학자들이 남긴 간 업적에 빚을 진 것은 비단 정문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시기에 성장한 많은 우리 학자들이 짊어져할 짐이다. 그러나 표절이나 도용 문제는 역사적 평가의 문제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윤리 문제다.

 

우치다는 그의 연구 인생을 정리하는 <치어를 찾아서>라는 책을 1964년 일본에서 발간한다. 이 책의 내용 중에는 그가 우리나라에서 물고기를 연구하며 겪은 흥미로운 일화들이 많다. 그런데 이기복은 정문기의 글이나 책, 특히 <어류박물지>를 통해 알려진 몇몇 유명한 일화들이 우치다의 책 내용과 거의 유사함을 밝힌다. 공교롭게도 정문기는 1964년 이전에 쓴 그 어떤 글에서도 문제가 되는 내용을 언급한 한 적 없어 우치다의 책을 표절한 의혹이 짙다. 이 문제를 명백히 밝히려면 좀더 많은 자료와 싸울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부끄러운 진실을 당당히 밝히는 일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정문기 박사(출처: 대한민국학술원)

 

참고문헌

1. 이길래, 바다 그 영원한 보고-바다에 도전한 사람들, 유풍출판사(1993)

2. 중앙대DCRC, 영월책박물관 편, 유리판에 갇힌 물고기-한국근대어류학과 어류사진아카이브, 중앙대DCRD(2004)

3. 정문기, 논문수필집, 한국수산기술협회(1968)

4. 정문기, 어류박물지, 일지사(1987)

5. 우치다 케이타로 지음, 변충규 옮김, 치어를 찾아서, 현대해양사(1994)

6. 대한민국학술원 http://www.nas.go.kr

 

* <자연과 생태> 2008년 5.6월호 (Vol. 15),  pp.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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