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에 식물분류학의 토대를 쌓다
정태현(鄭台鉉, 1882~1971)
글_이주희 | 자료협조_이우철 강원대 명예교수
하은(霞隱) 정태현(鄭台鉉)은 1882년 9월 21일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구한말부터 해방 후까지 활동한 우리 식물연구의 선구자이자 살아 온 삶 전체가 우리 식물연구의 역사인 존재다. 그는 시골로 낙향한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13살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나, 이듬해인 1895년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장남으로서 농사일로 가계를 책임져야했다.
1905년 24살이 되던 해 뜻한 바가 있어 농사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 상투를 자르고, 낮에는 염색소(染色所)에서 일하고 밤에는 광무학교(光武學校)라는 일본어강습소에서 공부했다. 얼마 후에 양잠학교로 옮겨 1년간 제사기술을 배운 뒤 귀향하여 누에를 기르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1907년 수원농림학교 임학속성과 2기로 입학했다. 1년 과정의 임학속성과는 조림사업을 위한 기술양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학과로 2회에 걸쳐 19명을 배출하고 폐과되었으며, 졸업생 대부분은 각 도의 수묘양성소(樹苗養成所)에 취업했다. 정태현은 1908년 졸업과 함께 대한제국 농상공부 수원임업사무소 기수(技手)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합병한 뒤 대한제국의 산림관련 부서들은 조선총독부 산림국으로 통폐합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원농림학교에서의 1년 과정이 식물과 관련한 학력의 전부였던 정태현은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은 일본인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고, 산림국 산림과 임시직(雇員)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는 식물분류학자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되는 계기를 맞는다.
일본학자들 조수로 일하며 성장
1910년 산림과에 부임한 일본 식물학자 이시도야 츠토무(石戶谷勉, 1884~1958)와 근무하면서 정태현은 본격적으로 식물표본을 채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쿄제국대학 교수로 있던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이 조선총독부 요청으로 1913년부터 우리나라 자생 식물을 조사하는 일을 맡게 되었고, 1914년부터 정태현이 나카이의 길안내와 통역을 맞는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30년 가까운 나카이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우리나라 식물상 연구에 있어 나카이의 업적과 영향은 절대적이다. 일찍이 한반도 식물상을 밝히는 것을 자기 일생의 소명으로 삼은 나카이는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위촉되기 전인 1909년부터 우리나라에서 식물 조사를 시작했으며, 1942년 육군사정장관으로 임명되어 태평양전쟁 중의 일본 점령지인 자바섬으로 떠나기까지 제주도와 울릉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의 식물상을 조사․정리했다. 이런 나카이의 대부분의 채집여행에 정태현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식물에 관한 지식을 차곡차곡 쌓았다. 한국산 식물만큼은 자신의 독무대로 여겨 다른 경쟁 연구자들이나 후학들에게 냉정하고 인색했던 나카이도 반평생을 함께한 정태현의 성실함과 식물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해 줄댕강나무의 학명(Abelia tyaihyoni, Nakai 1921)을 정태현에 바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분류학자
정태현은 1921년 기수(技手)로 진급하고 1922년까지 산림과에 머물렀다. 산림과에서 근무한 이 시기는 나카이라는 개인 스승을 모시고 식물분류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시기라면 볼 수 있다. 그는 1922년 8월 중앙임업시험장(현 홍릉수목원)으로 옮긴 뒤부터 본격적으로 연구 성과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무의 과별 분류 검색표와 설명을 담은 <조선산림수목감요(朝鮮森林樹木鑑要>(1923)를 이시도야와 공저로 펴내어 후학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나무별로 조림하기 가장 적합한 지역을 조사하는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지역별 고도별 수목 분포에 대한 매우 중요한 기초자료를 쌓았고, 줄댕강나무를 비롯한 많은 신종과 미기록종을 발견했다.
1932년에는 서울 지역의 조선인 생물교사들과 몇몇 생물학자들과 함께 ‘조선박물연구회’를 조직하고 첫 번째 사업으로 우리말 동식물 이름을 조사하고 제정하는 일을 착수하여, 그 결과 1937년에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 등의 동료 연구자들과 공저로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을 발간했다. 이 책은 식물 2천여 종의 우리말 이름을 학명과 일본명과 함께 정리한 것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던 일제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일본어를 모르는 몽매한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식물이름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 둘러대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은 오늘날 우리말 식물이름이 정해지는 데 기초가 되었다.
후학 양성에 힘쓰다
1945년 해방을 맞은 후 미군정이 실시되고, 혼란한 정치상황 속에서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의 정태현은 쫓겨 간 일본인들을 대신해 중앙임업시험장 조림부장(1946) 및 과장(1947)으로 재직하며 산림보호와 식물연구에 헌신했다. 이무렵 조선생물학회장(1945)을 역임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중앙임업시험장 고문으로 활동하며 서울대와 이화여대 생물학과에 출강하여 후학들을 가르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되면서 중앙임업시험장이 북한군 지휘소로 사용된다. 정태현은 그 동안 전국을 누비며 수집한 7만여 점의 표본과 자료를 고스란히 두고 떠나야했고, 안타깝게도 식물도감을 만들기 위해 따로 보관한 일부 표본을 제외한 모든 표본과 자료가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
안양의 한 고아원에서 피란 중이던 정태현은 전남대 농과대학장으로 있던 송재철 교수의 주선으로 1952년에 임학과 교수로 부임했으며, 1953년 같은 학교에서 명예이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1954년 성균관대 생물학과 조복성(趙福成, 1905~1971) 교수의 주선으로 성균관대로 생물학과로 옮겨 후학을 가르치다 80세가 되던 1961년에 정년퇴임했다. 그러나 생물학을 분야를 가르칠만한 학자들이 부족한 시절이라 강의를 그만 둘 수 없어 강사 자격으로 강의를 계속하다가 1963년에 다시 교수로 복직한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펼친 그는 이 무렵부터 고령으로 인한 건강문제가 생기기 시작해 1969년에 두 번째 정년퇴임을 맞는다. 그 후 얼마지 않아 1971년 11월 2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정태현은 대한민국학술원 회원(1954)을 역임했고, 학술원상(1956), 문화포장(1962), 5·16민족상 학예부문본상(1968), 국민훈장 모란장(1970) 등을 수상했다. 또 후학들을 독려하기 위해 5․16민족상 수상 때 받은 상금 200만원 중 100만원을 출연하여 1969년에 재단을 설립하고 하은생물학상을 제정했고, 지금까지 생물학 분야에 공로가 있는 학자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그는 앞서 언급한 저술 외에 <조선삼림식물도설(朝鮮森林植物圖說)>(1943), <한국식물도감>초본(1956) 목본(1957), <한국식물도감 식물편>(1965, 1970) 등과 수많은 논문을 남겼다.
[참조] 정태현과 카와모토
우리나라 식물 관련 문헌에서 저자 이름이 'Chung'으로 표기된 것은 정태현을 가리킨다. 그러나 식민지 시절에 정태현은 일본의 창씨개명 정책에 따라 성(姓_을 카와모토(河本)로 바꿔 사용해 일부 문헌에는 'Kawamoto'라고 표기되어 있다.
참고문헌
정태현, (2002), 『야책(野冊)을 메고 50년』, 숲과문화 제11권
이우철, (1994), 『하은 정태현 박사 전기』, 하은생물학상 25주년 자료집
이우철, (2008), 『한국식물의 고향』, 일조각
오수영, (1984), 『韓國의 維管束植物分類學에 關한 史的硏究 (1)』, 경북대논문집 제38호
* <자연과 생태> 2008년 7.8월호 (Vol. 16), pp. 1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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