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의 귀족
자작나무
글_이주희
눈처럼 희고 광택이 도는 피부와 훤칠하고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자작나무(Betula platyphylla var. japonica)는 그야말로 숲속의 귀족이다. 자작나무는 차고 건조한 유라시아 대륙 북부 지역에 주로 자생하며 우리나라에는 주로 강원도 북부를 비롯한 북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다. 간혹 중부 산간지역에서도 자작나무 같은 나무가 눈에 띄기도 하는데 거제수나무(Betula costata)를 비롯한 다른 종류의 자작나무과(Betulaceae) 나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즘 도심 공원 정원수로 자작나무를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으나 숲속의 귀족답게 오염된 환경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북방문화와 자작나무
낙엽 활엽수 종류가 많지 않은 북방지역에서 춥고 긴 겨울을 견디며 봄마다 새로운 잎을 틔우는 자작나무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신성한 나무로 인식되었으며, 북방민족들의 원시종교의식에서 하늘과 인간을 잇는 매체개로 여겨졌다. 역사적으로 우리문화가 북방문화에 속하거나 적어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 문화 중에 오래된 것들 중에서 자작나무의 신성과 관련한 여러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무속신앙에서 자작나무와 관련한 여겨지는 요소가 하나 있다. 굿판에서 제단 주변을 꾸밀 때 사용하는 지화(紙花) 장식이 자작나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흰 종이를 오려 만든 장식인 지화가 자작나무의 흰 껍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 개마고원 일대에서는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 자작나무 껍질로 시신을 싸서 묻는 장례 풍습이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1973년 경주 155호 고분(천마총)을 발굴하던 중에 발견된 말다래(障泥, 말굽에서 튀는 진흙을 막는 가리개)는 자작나무 껍질을 얇게 잘라서 이어 만든 것으로 거기에 그려진 ‘천마도’와 함께 우리 민족이 자작나무를 숭상했던 북방 유목문화와 직접 관련 있음을 증명한다.
자작나무는 북방민족들의 실생활에서도 요긴하게 쓰였다. 자작나무는 껍질과 잎 전체에 기름샘이 발달해 있어 기름기가 많기 때문에 불에 잘 타고, 잘 썩지 않는다. 그 특성 때문에 오래전부터 자작나무로 여러 도구를 만들거나 가구재, 건축재, 땔감 등으로 이용했다. 시베리아에서는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무두질을 할 때 자작나무서 추출한 기름을 이용했다. 또 얇게 벗겨지는 껍질은 불이 잘 붙어 초로 쓰이거나 종이 대용으로 쓰였다. 자작나무는 약재로도 쓰였으며, 특히 수액은 결핵 치료제로 쓰였다. 최근에는 자작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자일리톨(xylitol)’이라는 성분이 충치예방 기능이 있어 설탕을 대신하는 천연감미료로 많이 이용하고 있다.
자작나무는 한자어가 아니다
자작나무는 그 이름과 관련하여 얼핏 서양 귀족의 다섯 품계를 나타내는 한자말(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과 관련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자작나무라는 말은 순우리말이다. 중세 문헌을 살펴보면 최세진의『사성통해(四聲通解)』중간본(重刊本, 1614)에 ‘작나모’,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1728)에는 ‘자쟝’로 쓰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자작’이 무슨 뜻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기름기가 많은 자작나무가 불에 탈 때 ‘자작자작’하는 소리가 난다하여 자작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자작나무를 한자어로 백단(白椴), 백화(白樺)라고도 부른다. 화(樺)는 자작나무를 뜻하며 자작나무의 얇은 껍질은 붉을 밝히는 초로 쓰였다. 그래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초를 화촉(樺燭)이라고 한다. 흔히 결혼식에서 ‘화촉(華燭)을 밝히다’라는 말을 쓰는데, 화(華)는 자작나무(樺)와 뜻이 서로 통하므로 화촉(華燭)은 바로 자작나무로 만든 초(樺燭)인 셈이다. 자작나무로 만든 초는 양초가 등장하기 아주 오래 전부터 일상생활에서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자작나무를 시라카바(シラカバ, 白樺)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흰 자작나무’라는 뜻이다. 영어로 자작나무 종류를 버취(birch)라고 하며 특히 자작나무는 화이트 버취(white birch)라고 한다. 버취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브헤렉-(bhereg-)’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며 그 뜻은 ‘어스레한 빛’ 또는 ‘흰색’을 뜻한다. 산스크리트어를 어머니로 삼는 수많은 유럽 언어들 속에서 그 흔적인 남아있는데, 특히 영어와 아주 가까운 친척 언어인 북유럽 여러 나라 말 속에서도 버취와 유사한 형태와 발음을 띤다. 대표적으로 독일은 비르케(Birke), 네덜란드는 베르크(berk), 덴마크는 비르크(birk), 스웨덴에서는 비요크(björk) 이라고 한다. ‘어둠속의 댄서’라는 영화에 출연도 했던 아이슬란드 여성 뮤지션인 비요크(Björk)도 그 이름의 뜻이 아이슬란드어로 자작나무다.
여러 나라에서 자작나무를 가리키는 말이 대체로 희고 광택이 도는 자작나무의 특징과 관련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순우리말인 자작나무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어 아쉽다. 자작나무가 많은 우리나라 북쪽 지역 방언으로 자작나무를 ‘보티나무’라고도 부른다. 자작나무는 드넓은 유라시아 초원을 호령했던 북방민족의 나무다. 앞으로 이들 문화와 언어를 우리말과 비교 연구한다면 자작나무를 비롯한 많은 우리말의 유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
1. 전영우, “무속신앙에 나타나는 자작나무의 상징적 의미”, 숲과 문화 총서, vol. 7, 수문출판사(1999)
2. 이유미,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가지』(개정판), 현암사(2005)
3. 김민수 편, 『우리말 語源辭典』, 태학사(1997)
4. Skeat, W. W. 『Etymological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개정판), Oxford Univ. Press(1983)
5. "birch", www.etymonl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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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과생태> 2008년 1, 2월 통합호 '내 이름은 왜?' 기사 초고입니다.
* 일반적인 인터넷 환경에서는 한글 고어가 화면에 제대로 표시되지 않아 빈 공간으로 표시됩니다. 위에서 붉게 표시했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글을 스크랩해서 문서편집(한글, 워드) 프로그램으로 열어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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