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 이름 연구/생물 이름 이야기

도장나무 회양목, 흔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귀한 나무

식물인간 2020. 4. 26. 14:54

도장나무 회양목

흔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귀한 나무

 

글_이주희

 

도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뭘까? 은행나무,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 벚나무 같은 가로수가 떠오를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도 회양목이 아닐까싶다. 회양목은 작고 도톰한 잎이 다복하게 나며, 사시사철 푸르고, 땅딸막해서 정원을 조성할 때 울타리 용도로 즐겨 심는다. 고층건물 주변, 아파트 단지, 주택가, 학교, 도로변, 근린공원 등 조경의 손길이 닿은 곳이면 약방의 감초마냥 빠지지 않고 회양목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으면 주변을 살펴보라. 아마 몇 걸음 안 가서 회양목을 발견하게 될 테니.

 

봄철에 회양목 주변에는 벌, 파리, 노린재, 풍뎅이 같은 다양한 곤충들이 모인다. 회양목 꽃에서 꿀과 꽃가루를 얻기 먹기 위해서다. 척박한 도심 생태계에서 회양목은 생산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그다지 못 끈다. 회양목이 꽃을 피운다는 사실도 잘 모른다. 꽃이 아주 작고, 초록빛이라 눈에 띄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사무실이 밀집한 건물 주변에 회양목을 심어 놓은 화단을 보면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회양목이 재떨이 취급이나 받을 나무는 아닌데.

 

회양목은 크게 자랄 수도 있지만, 보통 울타리로 삼기 때문에 웃자라지 않게 가지치기를 한다.  

 

고급 목재 회양목

회양목은 회양목과(Buxaceae) 회양목속(Buxus)에 속한 나무로, 온대와 아열대 지역에서 널리 자란다. 전 세계적으로 약 70종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회양목(B. koreana), 좀회양목(B. microphylla) 2종과 긴잎회양목(B. koreana for. elongata), 섬회양목(B. koreana for. insularis) 2품종이 자생한다. 이외에 다양한 재배품종이 수입되거나 개발되어 정원수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회양목은 평안남도와 함경남도 이남의 전국 야산에 널리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야생 회양목을 직접 보기란 쉽지 않다. 회양목은 석회질이 풍부한 토양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의 일부 석회암 지대에서만 주로 볼 수 있다.

 

도심에서 보는 회양목은 줄기가 너무 가늘어서 어디 쓸 데가 있을까 싶겠지만, 회양목은 정원수보다는 오히려 목재로서 더 가치가 있다. 야생에서 오랜 세월 자란 회양목은 높이가 수 미터에 이른다. 또 다른 어떤 목재보다도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하며, 뒤틀림이나 갈라짐이 거의 없다. 그래서 정밀한 세공이 필요한 목공예에 적합하다. 하지만 회양목은 생장 속도가 느리고, 크게 자라지 않아서 주로 소형 목공예에만 쓸 수 있다는 것이 단점이다. 자라는 속도가 오죽 더뎠으면,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고도 거기에 안주해 다음으로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아둔해서 수행이 더딘 사람을 회양목에 비유해 황양목선(黃楊木禪)’이라고 한다. 여기서 황양목(黃楊木)’은 회양목의 한자이름이다.

 

일찍부터 인쇄술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회양목은 그 진가를 발휘했다. 도장이나 낙관을 새길 때 많이 이용해서 회양목을 흔히 도장나무라고도 부른다. 그만큼 작은 글씨까지도 정밀하게 새기기 좋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잘 닳지 않아서다. 돌배나무, 박달나무, 감나무, 산벚나무, 사철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목판인쇄에 사용되었지만, 그 중에서 으뜸은 회양목이었다. 뿐만 아니라 회양목은 금속활자를 만들 때도 이용되었다. 먼저 회양목에 글자를 새겨 활자를 만든다. 그리고 활자를 고운 진흙에 찍어서 거푸집을 만들고, 거기에 구리나 납을 녹여 부어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특히 문치(文治)를 강조했던 조선시대에는 태종 3(1403)에 활자를 만들고 책을 인쇄하는 주자소(鑄字所)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국가가 주도하여 책을 편찬하고 보급하는 일을 꾸준히 펼쳤다. 이에 조선왕조 내내 회양목의 수요가 많아서 회양목이 많이 나는 지방에서 공물로 바치기도 했다.

 

또 조선시대의 주민등록증이라고 할 수 있는 호패(號牌)를 만들 때도 회양목을 사용했다. 호패는 상아(象牙)나 녹각(鹿角) 같은 짐승의 뼈로 만든 것과 나무로 만든 것이 있었는데, 신분에 따라 그 재질을 달랐다. 회양목은 상아나 녹각 다음으로 귀한 재료로, 태종실록에는 5품 이상의 관료만이 회양목으로 만든 호패를 착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영조 22(1746) 때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을 보면 생원진사 등 소과(小科)에 합격한 양반 계층만 착용할 수 있게 규정하고 있다.

 

근동지역과 서양에서도 아주 오래전부터 회양목을 목재로 사용했다. 유럽에서는 회양목을 정교하게 깎아서 체스 말을 만들었고, 고급 관악기와 현악기를 만드는 데도 사용했다.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악기인 백파이프도 원래는 18세기 전까지 회양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 목판화 작품 중에서도 회양목을 사용한 것이 많이 전한다. 특히 고대에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는 작은 나무상자를 만드는 데 회양목을 많이 사용했다. 재밌는 것은 영어로 나무상자를 뜻하는 박스(box)’라는 말도 그 유래를 거슬러 가면 회양목과 관련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회양목을 퓍소스(πυχος)’, 회양목으로 만든 작은 상자를 퓍시스(πυχις)’라고 불렀다. 이후 로마가 그리스 문화를 흡수하면서 퓍시스(πυχις)’라는 말도 그대로 전해진다. 로마인들은 처음에 글자만 라틴 문자로 바꾸어 퓍시스(pyxis)’로 표기해 썼는데, 나중에 북시스(buxis)’로 바뀐다. ‘박스(box)’는 바로 북시스(buxis)’가 변한 것이다. 한편 회양목을 뜻하는 퓍소스(πυχος)’는 라틴어로 북수스(buxus)’로 바뀌어, 오늘날 회양목을 뜻하는 학명(Buxus)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영어로 회양목을 뭐라 부를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정답은 박스(box)’이다. 북미권에서는 박스우드(boxwood)’라고도 부른다.

 

회양목의 유래

회양목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 강원도 회양(淮陽)’ 지역에서 많이 자라서 회양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회양에도 회양목이 자라겠지만, 지역을 대표할 정도는 아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소개된 회양 지역의 특산물에도 회양목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황해도 황주 지방과 충청도의 특산물로 소개되어 있다.

 

앞서 소개했듯, 회양목은 한자로 황양목(黃楊木)이라고 한다. 누런 버드나무라는 뜻으로 목질이 버드나무와 비슷하고 색깔이 누런빛이 돌아 붙은 이름인 듯하다. ‘회양목은 바로 황양목이 소리가 변한 것이다. 황양목이 언제부터 회양목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798년 편찬된 재물보(才物譜)1820년대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물명고(物名攷)등 조선후기 문헌에 한글로 화양목이라고 표기한 것이 보인다. ‘회양목으로 표기한 예는 1920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사전에 등장한다.조선어사전에서 주목할 점은 회양목을 회양목(楊木)’으로 표기한 점이다. 회양목에서 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다. 즉 회양목이 순수한 한자어가 아니라, 황양목이 변한 말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황양목>화양목>회양목으로 변했다.

 

우리말에서 한자를 사용한 역사가 길다보니, 회양목의 경우처럼 본래 한자어였던 말이 우리말처럼 바뀌는 경우가 많다. ‘목과(木瓜)’모과로 불리고, ‘호도(胡桃)’, ‘앵도(櫻桃)’, ‘자도(紫桃)’호두’, ‘앵두’, ‘자두로 바뀐 것이 좋은 예다. 배추백채(白菜)’, 상추는 생채(生菜)’가 변한 말이고, ‘김치침채(沈菜)’에서, ‘동치미동침(冬沈)’이라는 한자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