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 이름 연구

담비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식물인간 2020. 4. 28. 13:53

담비

담비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글_이주희

 

요즘은 가볍고 따뜻한 기능성 소재의 옷들이 많아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바깥에서 활동하기 불편하지 않다. 그런데 오리털 점퍼도 고어텍스 재킷도 없던 옛날 사람들은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 어떤 옷을 입고 지냈을까? 고려 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를 들여와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목화솜과 무명천을 생산할 수 있기 전까지, 이 땅에 살던 고달픈 민초들이 입던 것은 지금은 한 여름에나 입는 삼베로 지은 옷이었다고 한다. 물론 겨울옷은 여름옷보다는 두껍고, 또 속에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고 남은 찌꺼기나 보푸라기 같은 것을 솜처럼 만들어 옷 속에 넣어 입었을 게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비롯해 여러 중국 문헌에는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부터 백첩포(白疊布)라는 면직물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지난 1999년에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6세기 때 만들어진 직물 꾸러미가 출토되어 되었는데, 최근 연구진들이 그 섬유 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면직물로 밝혀져 학계를 놀라게 했다. 고려 말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면직물을 생산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생산하던 면직물은 인도가 원산지인 오늘날의 목화와는 다른 종류이며,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솜의 양이 목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적어서 이를 이용해서 짠 면직물은 비단 만큼이나 귀했다고 한다. 이래나 저래나 민초들이 따뜻한 솜옷을 입고 솜이불을 덮고 잘 수 있게 된 것은 산업스파이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문익점 선생 덕분이다.

 

비단 보다 귀한 모피

많은 사람들이 비단은 중국에서만 만들었다고 아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아주 다양한 종류의 견직물을 만드는 기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심지어 양잠기술은 보통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기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양잠기술은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개발해 전승되었다고 주장한다. 면직물과 마찬가지로 당시에 비단은 매우 귀해서 귀족들만 옷감으로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백첩포나 비단으로 몸을 둘러도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겨울에는 짐승 털가죽으로 만든 옷을 지어 입었다. 여러 옷감 중에서 비단이 가장 귀한 줄 알고 있지만, 사실 비단보다 더 귀한 것이 바로 모피였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옷은 신분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곤 한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신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옷의 종류와 재질을 규제했다. 특히 모피는 생산량이 많지 않아 비단보다도 사용 규제가 엄격했다. <삼국사기>에는 834년 신라 흥덕왕이 사치 풍조가 만연하자 이를 규제하기 위해 복식 규제령을 시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 중에 특히 모피를 사치품으로 여겨 엄격히 규제한 점이 흥미롭다. 이에 따르면 성골 귀족만이 모피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고, 진골 귀족조차 모피를 옷의 겉감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4두품이하 골품과 일반 백성들은 아예 모피를 소유할 수도 없었다. 사회혼란과 함께 신분질서가 흔들리는 시기에는 이런 규제가 무너져 사치스런 비단과 모피 옷이 등장하곤 했지만, 모피 사용을 규제하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특별히 하사한 경우가 아니라면 고위 관료들조차 모피 옷을 함부로 입을 수 없었다.

 

돈피와 청설모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여러 짐승의 털가죽이 많이 나서 특산물로 주변 나라에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던 것이 바로 담비의 털가죽이다. 담비는 족제비과에 속한 젖먹이동물로 우리나라에는 담비, 검은담비, 산달 3종이 산다. 담비를 달리 부르는 우리말 중에서 ‘돈’, ‘돈피(獤皮)’, ‘잘’ 등이 있는데, 특히 담비가 많이 나던 이북 지역에서는 담비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고 대신 ‘돈’이나 ‘잘’이란 말을 즐겨 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돈피(獤皮)’라는 말이 본래 담비의 가죽을 뜻하면서 동시에 담비라는 동물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생물 이름을 붙일 때 생물 자체에 대한 관심 보다는 그 생물의 쓰임새에 더 주목하곤 한다. 그래서 종종 어떤 생물의 이용 부위가 그 생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청설모’다. 다람쥐과에 속하는 청설모의 본래 이름은 ‘푸른 쥐’라는 뜻의 한자어 ‘청서(靑鼠)’다. 청서의 복슬복슬한 꼬리털은 예부터 붓을 만드는 재료로 널리 썼는데, 바로 청서의 털을 뜻하는 청서모(靑鼠毛)라는 말이 변해서 ‘청설모’가 된 것이다. 담비의 경우, 돈피라는 말 뿐만 아니라 ‘돈’과 ‘잘’이라는 말도 담비 가죽을 뜻한다. 특히 ‘잘’은 주로 검은담비와 검은담비의 가죽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참고로 검은담비는 함경도 이북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담비 (사진출처: 국립환경과학원)

 

담비를 이르는 말의 유래

담비를 이르는 여러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우선 ‘돈피’라는 말에 대해 알아보자. 국어사전에 ‘돈피(獤皮)’를 한자로 표기하고 있어 한자어로 알기 쉬운데, 가죽 피(皮)는 분명 한자어가 맞지만 ‘돈(獤)’은 우리 토박이말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담비의 가죽을 뜻하는 돈(獤) 자는 논을 뜻하는 ‘답(畓)’ 자처럼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로,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오랜 한자 문화 속에서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필요에 따라서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 이를 ‘국자(國子)’라고 부른다. 내 생각에는 ‘돈’은 담비를 뜻하는 토박이말이었고, 이를 표기하기 위해 도탑다는 뜻의 한자 ‘돈(敦)’ 자에서 소리를 빌려오고 길짐승을 뜻하는 부수 글자 ‘견(犭)’을 덧붙여 새로운 한자(獤)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어로 담비를 ‘텐(てん)’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말 ‘돈’이 건너간 것이다.

 

반면에 순우리말처럼 보이는 ‘잘’은 수달을 뜻하는 한자 ‘달(獺)’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그 근거로 우선 우리말에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ㅌ’은 ‘ㅊ’으로, ‘ㄷ’은 ‘ㅈ’으로 소리가 변하는 이른바 구개음화 현상이 도드라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중세 국어의 ‘둏다’가 오늘날 ‘좋다’로 바뀌었고, 한자어 중에서도 ‘텬(天)’이 ‘천’으로, ‘뎐(田)’이 ‘전’으로 소리가 바뀐 것이 좋은 예다. 따라서 ‘달(獺)’이 ‘잘’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 근거는 ‘잘’이라는 말이 주로 검은담비를 가리키는 말로 많이 쓴다는 점이다. 검은담비는 털가죽이 검다. 공교롭게도 담비와 같은 족제비과 동물인 수달의 털가죽도 검다. 털가죽의 이용이라는 관점에서 생물을 바라봤을 옛 사람들은 털 빛깔이 검은 수달과 검은담비(잘)를 같은 무리로 보았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오늘날 북한에서는 물가에 사는 수달(水獺)과 구별해 산에 사는 담비를 산달(山獺)이라고 부르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담비’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중세 국어에 ‘담뷔’라고 표기한 예가 보이지만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다만, ‘돈피’라는 말과 ‘담비’라는 말이 소리가 비슷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즉 담비라는 말은 ‘돈피’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담비 (사진출처: 국립환경과학원)

 

 

*<자연과 생태> 2012년 2월호 (Vol. 55) pp. 66~67